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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仁의 視線/읽거나 보고 듣고 느낀 후

회초리 – 초심을 위해 스스로에게 매를 드는 것이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회초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유쾌하면서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회초리라는 말은 원래 나무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는데 이것을 영화에서는 回初로 뜻을 부여해 처음 뜻으로 되돌리게 하는 나무라고 표현했다. 그럴듯했다. 회초리는 초심을 잊고 해이해진   우리의 마음을 다잡을 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회초리는 정치에서도, 교육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꼭 필요해 보인다. 상징적인 것이든, 실질적인 것이든 말이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회초리를 직접 준비해 스승께 드리고, 일정한 장소에 보관을 한다. 만약 잘못을 하여 회초리가 필요하다고 여기면, 스승은 잘못을 한 제자에게 스스로 준비하여 보관하게 하던 회초리를 가져오게 한다. 제자는 회초리를 가지러 가는 동안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스승은 혹여 감정이 개입된 화가 있다면 삭히는 시간을 가진 후 훈계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의식화(ritualization) 행위이다. 단순히 잘못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매를 드는 과정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체벌은 어떤 형태로든 금지되어야 한다는 분위기에 회초리의 의미마저 퇴색해 버린 듯하다. 물론 유형이든, 무형이든 폭력은 기본적으로 근절되어야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체벌만 사라졌을 뿐, 여전히 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학교에서조차 인격적 모욕을 느낄만한 언어폭력 및 징벌, 차별 등 교육의 현장에서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벌어지는 듯하다. 한편에선 많은 인원의 아이들을 통솔하려면 어떤 형태로든 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일리 있는 말이라고 수긍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잘못을 한 제자를 스승이 벌하기 전에 제자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스승이 먼저 회초리로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나를 가르쳐주시던 나의 스승을 생각하게 되고, 학교라는 공간이 과연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분명한 것은 학교는 입시학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은 단순히 직업 중의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학교는 규범을 익히고 앞으로 함께 삶을 영위할 또래 세대와 교감하는 공간이다. 이 가운데 삶의 원칙을 마련할 수 있도록 안내자가 되는 것이 스승이 아니겠는가?

 

교사의 윤리에는 교사란 인간이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그를 도와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다고 한다.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기 창자도 꺼내 주는 것이 부모라는데 그런 부모와 같다는 스승의 자리를 철통 밥그릇으로만 여겨서야 과연 배움이 있겠는가? 비단 교사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선생(先生)이란 연장자의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가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선생은 바로 부모이며 가족이며 이웃을 포함하는 사회다. 부모도 교사와 함께 교육에 철학을 갖고 회초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이며, 이 사회의 어른이라면 스스로의 회초리를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다양한 방법의 회초리로, 회초리는 약이 되도록 때려야 한다고 영화에선 말한다. 자칫 타인에 의한 인격모독을 회초리라고 억지 주장할 것이 걱정되지만, 그렇다고 본 의미를 외면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조선의 향교는 각 지방관의 관할 하에 부(대도호부(大都護府()에는 각 90, 도호부에는 70, ()에는 50, ()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었다. 양주와 포천의 향교를 지나며 옛 스승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미관말직이나마 제자를 키워내는 스승의 자리인지라 스스로를 향한 회초리를 더 엄격하게 들었던 옛 스승의 삶과 가르침. 회초리를 드는 자, 스승의 자리는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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