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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n's Insights

민주주의는 일상생활에서 시작되고 실현된다

얼마 전, 한 정치인 지지자 모임에 참석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누군가 나이를 물었고, 곧이어 호칭이 정리되며 위계가 형성되었다. 언니, , 동생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갔고, 서로의 말투와 태도는 순식간에 정돈되었다. 나는 그 상황이 몹시 낯설고 경직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치적 연대를 위한 자리에서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서열이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이 장면에 대해 그 누구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듯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나 예절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중성, 곧 공적 영역의 민주화와 사적 영역의 위계 질서가 공존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쳐왔지만, 정작 일상에서는 여전히 나이, 성별, 직급, 학벌에 따라 말의 무게와 권위가 달라지는 구조가 조직 내에 공고히 유지되고 있다.

최근 대학에서 학생회 활동을 시작한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 대학 다닐 때는 지금보다 더 엄격한 선후배 간 위계가 있었던 것 아니냐. 그는 이를 자연스럽게 장유유서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사람을 하대하거나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문화는 유교적 전통이라기보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군국주의 질서와 군사독재 시기의 병영 문화에서 비롯된 잔재다. 전통 유교에서도 존장(尊長)은 어른을 공경하라는 뜻이지, 어린 사람을 얕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군사문화와 산업화 시대의 조직 논리에 익숙해지며 아래의 언어를 일상화했고, 그 언어는 지금도 많은 모임과 관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위계적 문화는 새로운 정치 참여를 방해하고, 특히 청년과 여성의 목소리를 위축시킨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발언 순서가 밀리고, 사회화 경로가 다르다는 이유로 발언의 비중이 달라지며, 경청보다는 지시에 가까운 말이 오가는 구조 속에서 사람은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분위기에 놓인다. 생각과 표현은 위축되고, 정치에 대한 감정적 거리감마저 생긴다. 사람은 존중받는다고 느낄 때 온전히 말할 수 있다. 발화 단계에서부터 말의 무게가 달라지는 환경에서 언어의 효능감은 떨어지고, 생활 속 위계는 그런 감정을 침묵하게 만든다.

물론 나이에 따라 호칭을 정리하면 조직 운영이 효율적이고,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함께하며 노력하자는 정치적 모임이 시작부터 위계화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비민주적 질서를 재현하는 모순이 된다. 더불어 생활민주주의와의 불균형은 구성원 간 아노미 현상을 내재화하여, 종종 영문도 모를 갈등으로 표출되곤 한다.

민주주의는 단지 헌법 속 권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어떤 언어를 쓰며, 어떤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는가에 드러난다. 정치인들이 시민의 목소리를 강조한다면, 시민이 모이는 공간부터 민주적이어야 한다. 지지자 모임은 단순한 팬클럽이 아니다. 그 자체가 정치의 연습장이자 공론장의 축소판이다. 그 공간이 위계로 조직된다면, 정치에 대한 신뢰는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인가?

생활민주주의는 결코 작거나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고, 다음 세대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정서적 기반을 만든다. 민주주의는 단지 투표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민주주의는 투표로 시작되지만, 삶의 말투와 관계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정치의 변화를 바란다면, 우리의 일상생활, 우리의 일상 언어부터 바뀌어야 한다.

진짜 정치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부르고, 함께 살아가는가에서 시작된다. 나의 배우자, 아이들, 부모님, 친구들, 이웃들 나의 살아 있는 시간을 함께하는 이들과 나누는 모든 일상의 콘텐츠가 건강한 문화로 정착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오늘을 노력하며 살아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