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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仁의 視線

​​우리도 조국이 될 수 있다

조국 장관 임명 과정을 8월부터 지금까지 지켜보며 각각의 입장에 선 무리들의 행태들을 살피고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야당의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과연 이들이 문제제기를 할 자격이 있는가, 뻔뻔스럽게도 제 눈에 대들보가 있는 자들이 남의 눈에 티끌을 침소봉대하는 작태에 혀를 내두르며 이들의 파렴치함이 불치의 수준임을 다시 확인한다. 뜬금없는 검찰의 조사는 자성 기능을 상실한 엘리트 기득권층의 독선과 아집의 관성에 가속도까지 붙어 돌이키기 어려운 길로 접어들었다. 이 모든 과정을 비판적, 객관적 시선은커녕 기계적 중립조차 지키지 못한 채 어느 일방의 프레임에 놀아나는 도구가 되어 부화뇌동하는 언론을 본다.

각각의 셈법은 달랐겠지만 이해를 함께 하는 한 점에서는 모두가 한 목소리로 공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연인으로서 한 개인의 삶을 부정하고 범죄자로 몰아세웠다.

자녀 문제야 그 시대의 교육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트집임을 이미 잘 아는 것이고, 배우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샌님 남편을 둔 덕에 혼자서 똑똑하게 굴며 나름 가정경제를 꾸린 여느 살림꾼이었던 셈인데…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비친 정교수를 보면 이 모든 사건이 마무리가 된 후 가족들 틈에서 어떻게 그동안의 상처를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 가정이 과연 온전할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오늘 조국 장관은 검찰개혁을 위한 불쏘시개로서 역할을 마무리하고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 그동안 함께 하지 못했던 가장으로서 서겠다 한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맥락이 배제된 팩트의 나열, 혹은 소설, 허위조작정보를 양산하며 “국민의 알 권리” 운운하던 비열한 치들을 노려본다. 이들이 얼마나 국민의 온전한 알 권리를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다하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겠다.

이미 상처 받은 이들을 원상태로 되돌리기는 어렵다. 그래도 오해받은 채로 억울하게 사회에 복귀하지 못한 채 방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억울한 오해는 풀고, 더디더라도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고 배려하는 후속의 조치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지켜봐야 한다.

이번 조국 장관 및 그 가족에게 행해진 린치는 비단 공직자로서 감내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었다. 언제고 그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서슴없이 도구로 사용하고 버려져 피해자로 남을 수 있는 한 개인을 재확인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가정을 풍비박산 내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나 몰라라 하는 사회에 나와 내 아이가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깨닫자 소름이 돋는다.

검찰 존재의 본래 목적이 인권보호라 한다. 언론은 거대 권력들 틈에서 균형을 찾아 진실을 전하고 국민을 보호한다. 정치인도 그렇고 하나같이 국민을 위하고, 인권을 보호한다 말한다. 그러나 현실을 상상하니 섬뜩하다. 나와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보호받을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절박하게 느껴진다.

사전에 있는 뜻대로 말로만 하지 말고 우리가 신뢰할 수 있으려면 가시적인 노력과 시간이 쌓여야 한다. 신뢰를 얻기 위해 처절한 애씀이 요구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물며 잃었던 신뢰를 되찾는 노력과 시간은 처음보다 더 어려움을 각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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